스무 살이 본 ‘결정의 무게’
봄 학기가 시작되면 도서관 3층 열람실에는 이상한 공기가 흐른다. 다들 노트북을 펼쳐 놓고 있는데, 화면에는 수강신청 창 대신 취업 로드맵이 열려 있거나, 어학연수 후기 블로그가 열려 있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빈 메모장이 열려 있다. 나도 그랬다. 커서가 깜박이는 걸 한참 보다가, 결국 커피를 한 잔 더 사 왔다.
선택지가 많은 시대라는 말은 분명 사실이다. 전공은 복수로 들을 수 있고, 진로는 세 번쯤 틀어도 늦지 않다고 하고, 사는 도시도 서울이 아니어도 된다고 하고, 관계도 예전처럼 단 하나의 형태로 묶일 필요가 없다고 한다. 이 말들이 전부 거짓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은 진심 어린 격려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말들이 등을 두드리는 대신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심리학에는 ‘선택의 역설’이라는 개념이 있다. 선택지가 늘어날수록 만족도가 낮아지고, 결정 후에도 후회가 깊어진다는 얘기다. 나는 그 개념을 처음 들었을 때 너무 학문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전공을 고를 때, 교환학생 나라를 고를 때, 첫 인턴십 지원서를 낼 때, 그 역설이 몸으로 느껴졌다. 어느 문을 열든 나머지 문들이 소리 없이 닫히는 느낌. 선택이 가능성이 아니라 포기의 다른 이름처럼 느껴지는 순간.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말의 무게는 거기서 온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면, 지금 내가 선택한 이것이 최선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 더 나은 선택지가 어딘가 있었을 가능성을 스스로 지워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지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학교는 정답을 고르는 법을 가르쳤지, 정답 없는 질문 앞에서 버티는 법은 가르치지 않았다.
친구 중에 의대를 그만두고 디자인을 시작한 애가 있다. 다들 대단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밤에 가장 자주 하는 말이 뭔지 아는가. “나 잘하고 있는 거 맞지?” 대단한 선택을 한 사람도 그 질문을 멈추지 못한다. 선택의 크기와 확신의 크기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스무 살 넘어서야 조금씩 알게 된다.
결정 피로라는 말이 요즘 자주 들린다. 아침에 뭘 먹을지, 어느 강의를 들을지, 이 사람과 계속 만날지, 이 도시에 계속 있을지. 크고 작은 선택들이 하루를 꽉 채운다. 그리고 사람은 이상하게도, 큰 결정을 잘 내리려면 작은 결정들에서 에너지를 아껴야 한다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그 작은 것들마저 전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편의점 도시락 하나를 고르면서도 이게 내 삶의 방향과 맞는지 생각하는 게 이 세대의 특이한 병이라면 병이다.
그렇다고 선택지가 적었던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다. 부모님 세대처럼 ‘당연히 이 길’이 있었던 구조가 더 나았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자유가 무게를 동반한다는 것을, 누구도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다. 열린 문 앞에서 설레기도 하지만 멍해지기도 한다는 것. 그 멍함이 게으름이나 나약함이 아니라는 것.
요즘 나는 결정을 내릴 때 조금 다른 방식을 쓴다. 어느 선택이 더 나은지 따지는 대신, 이 선택을 한 나를 내가 감당할 수 있는지를 먼저 본다. 완벽한 선택은 없을 테니까. 감당할 수 있는 선택과 아닌 선택만 있을 테니까. 그렇게 고른 길은 후회가 없지는 않지만, 적어도 남의 후회가 아니라 내 후회다.
열람실 커서는 오늘도 깜박이고 있을 것이다. 그 앞에 앉아 있는 누군가는 아직 메모장이 비어 있을 것이다. 그게 이 계절의 우리 모습이고, 나는 그게 꽤 솔직한 풍경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