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無爲’와 서양의 자유의지
노자는 말했다. 為學日益,為道日損. 배움은 날마다 더하고, 도를 좇음은 날마다 덜어낸다고. 무위(無爲)라는 개념은 처음 들으면 게으름이나 체념처럼 들린다. 그런데 정작 노자가 말하는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는다는 쪽에 가깝다. 강물이 굳이 돌을 밀어내려 하지 않아도 결국 깎아 내듯이, 억지 없이 흐르는 것이 가장 강한 힘이 된다는 역설이다.
서양은 오랫동안 다른 자리에 서 있었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를 세계의 중심에 세웠고, 칸트는 이성이 스스로 법칙을 세울 수 있다는 자유의지의 토대를 다졌다. ‘나’는 숙고하고 결단하고 선택한다. 행동은 의식의 명령이고, 자유는 그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다. 이 그림 속에서 인간은 세계를 향해 의도를 쏘아 올리는 주체다.
그런데 1980년대 벤저민 리벳의 실험이 그 그림에 금을 냈다. 손목을 구부리기로 ‘결심하는’ 순간보다 뇌에서 준비 전위가 먼저 올라온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실험은 이후 수십 년간 해석을 두고 끝없이 논쟁됐다. 의식적 결심이 아예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결심했다’고 느끼는 그 타이밍 자체가 뇌가 구성한 이야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선택이 일어나고, 그다음에 내가 선택했다는 이야기가 붙는다.
여기서 동양과 서양이 묘하게 가까워진다. 무위는 억지 자아를 내려놓는 것이라 했다. 신경과학은 ‘억지 자아’라고 부를 만한 의식적 통제자가 생각보다 훨씬 늦게 무대에 등장한다고 말한다. 노자가 강물을 빗댔던 것처럼, 뇌도 우리가 알아채기 전에 이미 흐르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는 없는 걸까. 아니면 자유의지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걸까.
여기서 두 전통은 또 갈라진다. 서양의 많은 철학자들은 리벳 실험 이후에도 자유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다만 형태를 바꿨다. ‘나는 시작한다’는 힘이 아니라, ‘나는 거부한다’는 힘으로. 리벳 자신도 의식이 행동을 시작하지는 못해도 ‘거부권’을 가진다고 보았다. 흐름이 이미 시작됐더라도, 그 흐름에 끼어들어 멈추는 것은 여전히 나라는 것이다. 서양의 자유는 행위보다는 저항과 거절 속에 깃드는 쪽으로 조금 이동했다.
노자라면 뭐라고 했을까. 억지로 거부하는 것도 또 다른 억지가 아닌가, 하고 물었을지도 모른다. 물은 막히면 돌아가지 막힌 벽을 이기려 싸우지 않는다. 무위는 흐름에 몸을 맡기되 흐름 자체가 되는 것이다. 선택이 ‘나’에게서 나오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보다, 그 흐름 안에서 저항 없이 움직이는 상태 자체를 묻는다.
동서양이 같은 질문 앞에서 다른 지점을 밝힌다는 것이 흥미롭다. 서양은 ‘나는 과연 선택하는가’를 묻고, 동양은 ‘나는 누구인가’로 질문을 밀어 올린다. 자유의지 논쟁이 격렬한 것은 선택하는 나의 존재를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무위가 매력적인 것은 그 나를 굳이 지키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매일 이 두 충동 사이를 산다. 결정해야 한다는 압박과, 그냥 두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한 신뢰 사이. 어느 쪽이 옳은지 묻기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떤 흐름 안에 있는지 조용히 살피는 것이 먼저일 수도 있다. 뇌가 이미 움직이고 있든, 내가 결단을 내리고 있든, 그 사이 어딘가에 진짜 나의 자리가 있을 것이다 — 아직 다 밝혀지지 않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