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 봄은 어떤 사람들의 봄인가
새벽 다섯 시, 태화강 둑길에 가장 먼저 봄을 밟는 사람은 주황 조끼를 입은 환경미화원 아저씨다. 그는 매실나무 아래 쌓인 꽃잎을 쓸다가 잠깐 빗자루를 멈춘다. 어제까지 없던 향기가 코끝에 닿았기 때문이다. 낮 동안 수천 명이 “봄이다”라고 말할 이 냄새를, 세상에서 가장 먼저 혼자 맡는 사람. 그는 특별히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그저 빗자루질을 다시 시작하면서, 오늘 꽃잎이 좀 많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 조용함이 어쩐지 오래 남는다.
일곱 시가 되면 책가방을 멘 아이들이 나타난다. 둑길이 등굣길인 아이들은 강 쪽을 볼 겨를이 별로 없다. 친구와 무언가를 속닥이거나, 핸드폰을 보거나, 아니면 어젯밤 꿈 이야기를 하느라 바쁘다. 그러다 한 아이가 문득 물 위에 앉은 왜가리를 발견하고 팔로 친구를 친다. 둘이서 잠깐 멈춰 왜가리를 바라보다가, 뭔가 크게 웃고, 다시 뛰어간다. 봄은 그 아이에게 왜가리 한 마리로 왔다가 십 초 만에 지나간다. 그것으로 충분한 봄이다.
오전 열 시, 퇴직한 노부부가 팔짱을 끼고 걷는다. 두 사람 다 말이 없다. 수십 년을 함께 살았으니 굳이 “꽃 예쁘다”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남편이 걷다가 벤치에 앉자 아내도 따라 앉는다. 강 건너 삼호대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걸 한참 바라보다가 남편이 말한다. “우리 저기 한번 걸었었지, 애들 어릴 때.” 아내는 “그랬나”라고만 한다. 두 사람의 봄은 지금 이 둑길에만 있는 게 아니라 삼십 년 전 어느 날 오후에도 같이 걸려 있다. 봄빛이 두 겹으로 비치는 사람들이다.
점심 무렵, 공사 현장 쪽에서 베트남 억양의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삼삼오오 도시락을 들고 나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둑길 입구 그늘에 자리를 잡는다. 한 남자가 도시락 뚜껑을 열다가 고개를 든다. 매화가 진 자리에 연두색 새잎이 돋아나고 있다. 베트남 어딘가에도 이맘때 이런 빛깔이 있었을 것이다. 그가 기억하는 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잠시 강 쪽을 바라보다가 동료에게 뭔가 말하고, 동료가 웃는다. 이 도시에서 봄을 처음 맞는 사람들의 웃음은, 봄을 수십 번 맞은 사람들의 그것과 조금 다른 질감을 가지고 있다.
해 질 무렵, 둑길 입구에 리어카를 세운 노점 상인 할머니가 호떡을 굽는다. 봄이 오면 호떡이 덜 팔린다. 따뜻한 음식은 겨울 장사다. 그래도 자리를 접지 않는 건, 이 시간대 산책 나온 사람들이 가끔 한 장씩 사가기 때문이다. 할머니에게 봄은 매출이 줄어드는 계절이기도 하고, 사람들 얼굴이 부드러워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오늘도 퇴직 노부부가 돌아가는 길에 한 장 사갔다. 할머니는 거스름돈을 건네다가 강 너머 하늘이 노랗게 물드는 걸 봤다. 반죽을 뒤집으면서 “오늘은 노을이 크네”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아무도 듣지 않았지만, 그 말은 강 쪽으로 천천히 퍼져나갔다.
태화강 둑길의 봄은 하나인데, 거기서 봄을 받아 가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빗자루질 사이의 냄새로, 왜가리 십 초로, 삼십 년 전 기억으로, 낯선 나라에서 맞는 연두색으로, 덜 팔리는 호떡과 큰 노을로. 같은 강, 같은 햇빛, 같은 날인데 사람 수만큼 다른 봄이 흘러간다.